편집 테이블의 유령
김예솔비
  • 편집 테이블의 유령 - 김예솔비
    언더 코드 네트워크 - 김예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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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보지 않고 공연에 대해 쓸 수 있을까? 보다 정확히는, 공연을 기록한 영상을 보고 공연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공연의 순간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이 글이 마치 특정한 작업에 대한 ‘비평(내지는 리뷰)’으로 읽힐 것을 의도하고 그것의 예정된 실패에 대해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드니 디드로의 『맹인에 관한 서한』에서 다루는 ‘사물’이 ‘공연’이라 간주해 보자. 맹인이 사물이 눈앞에 없는데도 사물이 거기 있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나는 그 공연을 본 적 없지만 공연에 대한 기억이 있는 것처럼, 기억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말할 수 있는 권리가 기인하는 것처럼 써야 한다.

 

공연의 영상 기록은 순간의 유일무이함을 전제로 하는 공연의 성질을 훼손하는 일일까? 우리가 모든 것이 기록된다는 조건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우리의 일상적 몸짓마저 짐짓 기록에 용이한 형태로 변형되고 있다. 하지만 기록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는 것이 우리가 더 용의주도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공연이 사후적으로 편집될 수 있다는 여지를 핑계 삼아 더욱 부주의해지거나 느슨해질 수도 있다. 반대로 우리는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정교해질 수도 있다. 영상은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예기치 못한 충돌을 만들어내고 속도를 늘리거나 가속하면서 시간을 조작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상이 공연을 매개하는 과정에서 어떤 ‘열화’를 거친다는 의심을 떼어내기 어렵다. 기록, 아카이브는 언제나 살아 숨 쉬는 우리의 경험보다 평평한 것으로 여겨진다. 때로는 치명적으로 오독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더불어 기록 영상을 통해 공연을 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일까? 그 새로움은 이전의 공연과 얼마나 가깝거나, 무관할까?

 

실시간 공연과 기록 영상 사이에 놓인 차이는 촬영장과 편집실(editing table)의 관계와 유사하다. 언제나 빛을 요하는 촬영장과 달리 편집실은 주로 컴컴한 방이나 지하, 때로는 창고에 비밀스럽게 마련된다. 편집실의 어둠은 촬영장의 빛이 반전된 장소로, 극장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한 가상의 시공간이다. 하룬 파로키는 편집실이 촬영된 이미지를 흐릿하게 만드는 곳이라고 말한 적 있다. 편집실에서 촬영된 것을 자르고 붙이고, 불필요한 것을 잘라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촬영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실수에 관대해지게 만든다. 편집실은 주물거리는 손에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수 있는 장소인 동시에 사후적으로 재편집될 수 있다는 중첩된 가능성으로 이미지를 변형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미지는 만질수록 모호한 무언가로 변모한다.

 

공연 기록 영상은 가장 주된 목적인 아카이빙을 위해서, 그리고 추후 이 공연을 접하게 될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서 촬영되고 편집된다. 후자에 관한 영상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공연의 정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가능한 모두에게 친절할 것. 뭎으로부터 전달받은 <오픈 셋: 콰드리엔날>의 기록 영상에는 공연을 기록한 장면뿐 아니라 공연의 맥락을 전달하기 위해 별도로 촬영된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다. 영상은 이 공연이 추후 영상을 통해 공연을 접하게 될 ‘누군가’를 위해 재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퍼포머들은 적극적으로 재연에 가담한다. 관객들이 빠져나가면, 공연은 카메라 뒤에서 연출가의 디렉션을 기다리는 세트장이 된다.

 

기록 영상을 통해 추정한 <오픈 셋: 콰드리엔날>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관객들이 처음 공간의 문을 열고 입장하면, 공간의 복도 대신 기다란 검은 벽을 마주하게 된다. 벽은 관객들이 공간을 자유롭게 누비지 못하게 가로막으며, 공간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내 벽이 서서히 각도를 틀기 시작하면(이 벽은 수상할 정도로 길고, 움직일 수 있도록 바퀴가 달려 있다. 길고, 바퀴가 달렸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 이 검은 벽은 기차와 유사하다) 관객은 벌어진 틈을 타고 공간 내부의 방을 차례로 방문하게 된다. 벽의 각도에 따라 열리는 문이 달라지는 것이다. 관객들은 거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혹은 당연하다는 듯이 공간의 열린 틈으로 진입한다. 관객의 발길은 어디로도 향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검은 벽이 유도하는 동선의 흐름은 꽤나 불가항력적이다. 검은 벽은 공간의 일부를 열고 닫는 힘이면서 퍼포머가 나타났다 사라지며 상황을 구사할 수 있는 배경의 구실을 한다. 공연의 끝에 이르러 관객은 다시 처음 진입했던 곳으로 돌아오고, 복도를 중심으로 양옆에 방이 펼쳐진 구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으로 영상은 마무리된다.

 

벽이 고정된 구조물이라는 오래된 지각의 관습을 따르자면 벽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회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특정한 순서로 방의 입구가 열리는 공간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공연에서 벽은 공간을 픽션적으로 재구성하는 시나리오다. 벽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질서가 재배치되고 있는 과정이라는 인식의 반전을 동반한 시나리오. 검은 벽의 움직임에 휩쓸리다 보면 돌고 돌아 다시 공간의 진입로로 돌아오게 된다는 점에서 이곳은 거대한 원형 테이블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관객의 동선뿐 아니라 출발과 도착으로 분리된 시간선 또한 원형으로 다시 맞붙는다. 편집 테이블 위에서 필름 릴이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검은 벽은 예측 불가능한 관객의 동선이라는 실시간적 상황을 숏의 단위로 수선한다. 무언가 편집되고 있다.

 

기록 영상은 이러한 정황을 보여주기 위해 공간의 체험을 장면적으로 재구성한다. 카메라로 추후에 촬영된 장면과 실시간의 장면이 뒤섞이면서 영상은 현장과 사후성 사이의 거친 이음매를 드러낸다. 이는 영화라는 장치가 가진 마술인 동시에 장치의 비밀이 폭로되는 순간이다. 관객은 거기 있다가 사라지고, 퍼포머는 손에 종이가 들려있지 않은데도 종이를 내려놓는 척 마임을 한다. 10분 간의 인터미션은 검은 화면으로 대체된다. 카메라는 대걸레를 미는 사람의 동작을 팔로우하고, 걸레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물자국을 클로즈업한다. 퍼포머의 몸짓이 관객이 빠져나간 무대에서 다시 한번 상연된다. 이것은 실시간과 이후라는 경계를 뒤섞으면서 실시간을 침범하는 손길이다. 그리하여 <오픈 셋: 콰드리엔날>의 기록 영상은 공간의 미스테리가 서서히 밝혀지는 서사의 구축을 위해 관객의 동선을 편집하는 것과 이를 다시 장면화하기 위한 숏이라는 측면에서 이중의 방식으로 편집을 논하게 된다. 이 공연에서 편집은 이미지와 공간을 자르고 붙이면서 특정한 의도를 만드는 일일뿐 아니라 우리의 경험이 ‘편집되었다’는 감각을 통해 중첩된 가능성으로서의 현실과 만나게 하는 도구다.

 

한 남자가 문지기에게 간청한다. 문 너머로 가게 해달라고. 문지기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문지기는 남자가 아주 늙고 쇠약해질 때까지, 그가 문지기의 코트 위에 사는 벼룩에게 간신히 말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쪼그라들 때까지 남자의 기다림을 방치해둔다. 그리고 청력이 떨어진 남자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이 문은 들어갈 수 없는 문이다. 그리고 이 문은 당신 때문에 생겼다.”[ 1 ] 검은 벽이 움직일 때, 우리는 벽 너머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벽 너머로 향하고 싶다는 충동과 벽 사이의 긴장이 공간을 휘어뜨리는 착시를 보고 있는 것이다. 벽은 바로 그런 유혹과 바람으로부터 출현하는 픽션이다. 프레임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없다는 외화면의 원리처럼 우리는 벽의 한쪽 면만 볼 수 있다. 그런 제약으로부터 모든 것이 가능해지기로, 우리는 약속했다.

 

 

P.S.

기록 영상에 대해 이야기하기의 어려움은 공연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화면에 출현하는 것에 대해 논하는 일을 종종 혼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착란과 연루되지 않고서는 이 글을 쓸 수 없었다. 편집실에 유독 유령에 관한 괴담이 자주 출몰하는 것처럼 이미지를 편집하면서 시공간을 뒤섞는 일은 의도와는 무관한 불길함을 불러들인다. 공연 기록 영상 또한 공연과는 여타로 잉여적인 감각을 생산한다. 그건 앞서 말했듯 경험이 열화된 흔적일 수도 있고, 부족함일 수도 있다. 이 공연이 ‘누군가’를 위해 재연되고 있다면, 그 ‘누군가’의 빈자리에 이미 주인이 있는 것처럼 상정하는 태도가 유령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너무 흐릿해서 과연 논할만한 부피가 있을지 의심이 들지만, 그럼에도 말해보려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가 결코 같은 것을 보지 않았고 결코 동일한 경험을 공유할 수 없다는 감각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언제나 불완전하게 매개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이 감각은 뭎의 퍼포먼스를 모니터 화면 너머로 볼 때 증폭되는 어떤 종류의 공포이기도 하다.

 

 

 


{오픈셋} ⊂ 쿼드리엔날 (2021)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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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구성: 뭎
출연: 박래영, 손민선, 조형준, 한아름
소리: 정진화
진행: 홍혜진
벽: 무단횡단
영상기록: 엽태준
사진: 최연근

  • [ 1 ]

    프란츠 카프카의 <심판>을 원작으로 한 오손 웰스의 동명의 영화 <심판>에 나오는 대사.

  • 김예솔비

    영화를 중심으로 시각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이따금 영화 비슷한 것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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