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 코드 네트워크
김예솔비

<버틀러와 포스터:양치기의 근심>, <팝업, 게릴라, 파르티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우리는 대합실에 모여 있다가 막 어두컴컴한 지하로 내려온 참이었다. 관객이 입장했으니 무언가가 시작되어야 한다. 공연이란 그런 약속이 실현되는 공간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벽 너머로 외국어 음성의 내래이션이 들리지만, 그 정체를 아는 일은 아직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좁은 복도에 모여서 다음 상황을 기다린다. 우왕좌왕한다. 아니,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연기하고 있다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어두운 복도 끝에서 카메라를 들고 이동하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카메라는 앞으로 이 공간에서 전개될 일을 알려주지는 못하지만, 잠재적인 사실 하나를 누설한다. 이 공연은 촬영되고 편집되어 추후에는 기록 영상이라는 아카이브 상태로 존재하게 될 거라는 사실. 나는 뭎의 공연 기록 영상에 등장했던 그 호기심 많아 보였던 관객들 중 일부가 (이미) 되었고,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12월에 <버틀러와 포스터:양치기의 근심>를 보러 갔을 때 겪었던 일이다. 뭎의 공연을 영상이 아닌 현장의 공연으로 관람한 것은 처음이었다. 공연에 대한 경험은 공연을 보는 사람을 재연하는 일과 어떻게 다른지, 두 가지 일은 어떻게 겹쳐지거나 분리되면서 공연의 경험을 구성하고 있는 건지, 공연을 보는 내내 실시간과 가까스로 붙었다가 떨어지는 의문들이 끊이지 않았다. 공연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었고 공간을 가로지르는 벽이 접혔다가 펼쳐지거나 회전하면서 복도가 되었다가 스크린이 되었다가 용도를 갖거나 폐기하는 경로를 따라 변모하는 동선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그건 고정된 스크린 앞의 고정된 의자에 앉아 영상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 설치구조물처럼 갱신되는 공간에 매번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일이었다. 관객이 가만히 앉아 있도록 강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척 자유로운 관람처럼 보이지만, 실상 관객은 관객의 전형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리액션을 통해 공연의 효과를 드러내는 요소로서 장치화되고 있었다. 영화에서 ‘인물’이라는 형상의 역할이 그렇듯 말이다. 물론, 이건 내가 “공연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영상 작업”으로서 뭎의 영상 포트폴리오를 접하고 영상으로 재구성될 것이라는 전제를 둔 관점에서 공연을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G.K 체스터턴의 소설 『목요일이었던 남자』에서 무정부주의자의 조직에 잠입한 형사처럼 무언가를 위장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검은 옷을 입고,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검은 옷은 위장과 거짓말이라는 속성을 외투로 빚어낸 것만 같다(자기 자신의 비밀을 외형의 차원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검은 옷은 투명한 베일이다).

 

<버틀러와 포스터:양치기의 근심>의 3부 <마을에 불어오는 바람>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버틀러와 포스터> 이전 연작 공연의 기록 영상을 편집한 것이다. 기다란 바 형태의 공간을 배회하고 있는 영상 속 관객들은 <버틀러와 포스터:양치기의 근심>을 보러 온 관객들을 거울처럼 비춘다. 이러한 형태의 스크리닝은 관객의 고정된 자리를 불확정적인 것으로 어지럽히면서, 관객의 존재감을 실존적인 차원에서 의심하게끔 만든다. 필립 오스랜더는 『행위 이후: 퍼포먼스 아트의 (재)현Die (Re)Präsentation der Performancekunst/ The (Re)Presentation of Performance Art』에서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을 논하며 관객의 범주를 퍼포머가 직접 신호를 보내는 1차 관객과 퍼포먼스를 오로지 도큐멘테이션으로만 경험할 수 있도록 상정된 2차 관객으로 나눈다.[ 1 ] 이러한 분류를 참조했을 때 <버틀러와 포스터:양치기의 근심>은 표면적으로는 공연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1차 관객을 대상으로 한 퍼포먼스로 여겨지지만, 3부의 영상 스크리닝은 이것이 추후 기록 영상으로 공연을 접하게 될 2차 관객을 염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1차 관객에게 계속해서 되먹임한다. 1차 관객과 2차 관객의 자리를 중첩시키면서 관객이 현장을 실시간의 사건으로 경험하는 것을 교란하고 있달까. 관객의 몸은 공연장에 있지만, 언제든 퍼포먼스의 효과로서 추상화될 수 있다. 관객은 도큐멘테이션과 퍼포먼스 사이에서 이중인화되어 퍼포먼스와 도큐멘트의 중첩을 가시화하는 창구로서 거기 존재한다.

 

그러니까 그날 그 공연장에서 내 존재감은 아주 희미하거나 거의 없었다. 나는 여기 있는 동시에 저기 있는 존재이거나, 어느 곳에도 없었거나, 관광객 같은 효용성으로 대체된 채 그 공간을 투명하게 배회하고 있었다. 사실 어떤 공간을 ‘경험’한다는 것에는 관광객이 되는 것 같은 측면이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공간에 드나들지만 매번 그 공간의 용도와 배치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따지지 않는다. 어떤 공간에 진입한다는 것은 그 공간을 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극장에서 상영 도중 갑자기 불이 켜지면 우리는 이곳이 다른 세계가 아니라 사방이 벽으로 둘러막힌 물리적인 공간이었을 뿐이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공간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일상이 비일상으로 전환되는 체험은 ‘관광’과 유사하다. 어딘가로 멀리 떠나야만 관광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관광은 고정되어 보이는 체제에 우연을 도입하는 일이며, 지금 현실이 최선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각성의 수단으로서 유용하게 장려된다.

 

<팝업, 게릴라, 파르티잔>이라는 공연의 기록 영상을 재구성한 동명의 영상 작업 <팝업, 게릴라, 파르티잔>(이 작업은 백종관 감독에 의해 <검은 옷을 입지 않았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은 공간과 ‘공간 경험’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이때 ‘관광’이란 공간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중 하나로 소환된다. <팝업, 게릴라, 파르티잔>에 대한 공식 설명을 따르면 이 공연은 두 작가가 2019년 11월 16일에 프랑스 파리 중심가에서 휘말리게 된 한 사건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그날 파리에서는 유류세 인상 결정에 반대하며 시작된 ‘노란 조끼 운동’의 1주년을 기념하는 블랙 클래드(검은 옷과 검은 마스크 등을 착용한 시위대) 시위가 벌어졌다.[ 2 ] 블랙 클래드는 주로 정치적, 사회적 항의에서 검은색 복장을 통해 연대와 익명성을 강조하는 시위의 형태를 일컫는다. 블랙 클래드의 검은색은 집단의 정체성과 단결을 나타낼 뿐 아니라 시위자들의 개별 신원을 숨기고 보호하는 효과를 갖는다. 검은 옷과 마스크, 후드는 개인을 보호하고 집단행동을 용이하게 만든다.

 

2019년 11월 16일의 뉴스 영상을 검색하면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도로를 점거해 자동차로 바리케이트를 만들고 경찰과 충돌하는 모습이 보인다. 도심의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블랙 클래드 시위대와 이를 진압하는 경찰 사이에서 무력 충돌과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외국에서 외국어로 진행되는 시위. 관광객의 입장에서 맞닥뜨린 시위와 진압의 폭력은 구체적인 이해관계의 맥락에서 설명되기보다는 관광의 연장선에서 조우하게 된 사건과 스펙타클 중 하나로 여겨졌을 것이다. 관광객은 추후 검색을 통해 시위의 의미를 뒤늦게 알게 되거나 영영 모르게 된다. <팝업, 게릴라, 파르티잔>은 바로 그러한 시차와 이해의 간극을 어떻게 공간 경험으로 재생할 수 있는지 실험한다. 영상에서 공연의 챕터는 각각 팝업, 게릴라, 파르티잔이라는 단어를 모스부호로 변환해 송신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백남준아트센터 2층 블랙박스에서 진행된 이 공연은 미술관의 전시실을 아직 용도가 정의되지 않은 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팝업, 게릴라, 파르티잔의 의미를 공간 현상으로 변환하고자 한다. “일정한 거점 없이 불쑥 나타나서 비공식 경로에 의해 불규칙적이고 변칙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로써 공간을 재구획”한다는 공연에 대한 설명처럼, 우리는 2019년 11월 16일 파리의 광장이라는 시공간에 있지 않지만 특정한 장소와 순간의 성질을 환기하는 조건들에 대한 체험이라는 ‘공간 경험’을 통해 시위와 접속할 수 있다. 시위는 지리적 시공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경험의 유사성을 공유하는 공동체적 사건으로 재구성된다. 블랙 클래드가 특정 국가나 시간, 공간, 단체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익명의 시위라는 실천적 행동의 단위로 묶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검은 옷을 입을 수 있다.

 

움베르트 에코는 옷이 의미를 나타내는 방법에 대하여 ‘언더 코드’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그것은 옷의 의미가 분명하게 합의된 기호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집합적인 암시와 어림짐작을 통해 생겨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

 

검은 옷은 어떤 의미를 실어 나르지만 그 의미가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대체로 검은 옷은 추모의 뜻이나 검소함을 암시하지만, 특정한 상황과 맥락 안에서만 그렇게 독해될 뿐이다. 검은 옷 자체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검은 옷을 입지 않았습니까?”라고 되묻는 것은 검은 옷을 특정한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코드처럼 다룬다. ‘검은 옷’이라는 코드를 통해 당시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재현하는 이유는 팝업, 게릴라, 파르티잔이라는 활동 자체가 비공식적이고 불규칙하며 공적 질서의 불협과 틈을 통해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불쑥 나타나서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는, 기존의 공간 경험을 설명될 수 없는 틈새로서의 사건은 공적인 언어가 아니라 ‘언더 코드’들로 유통될 수밖에 없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모두 시위대라 부를 수는 없지만, 시위대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시민과 시위대, 관광객과 시민, 시위대와 관광객 사이를 가로지르는 차이들을 코드화할 수 있는 것처럼. <팝업, 게릴라, 파르티잔>은 바로 그러한 차이 속에서 코드화되는 존재들 간의 연결을 위해 발명된 언어다. 불시에 자리를 점거하고 사라지는 계획된 존재들의 자리는 느슨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새로운 형태의 ‘시위’를 조직한다.

 

팝업, 게릴라, 파르티잔의 조건들에 대해 말하면서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거론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비상사태가 더 이상 예외적이지 않은 일상 속에 살고 있다. 남태령에서, 한강진에서, 거리는 구호를 외치고 의지를 표명하는 공간으로 거듭난다. 집회가 끝나면 거리는 되돌아오지만 광장을 만들어냈던 기억은 일종의 공간 경험으로 남아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다. 이처럼 정치적 경험은 선명한 기호들이 아니라 저항의 목소리(들)을 위한 광장이 언제 어디서든 조직될 수 있다는 공통의 감각-‘언더 코드’를 통해 유통될 것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아나키즘이 대안적인 형태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조직 형태로 가능한 모든 규모의 무수한 공동체, 연합, 네트워크, 기획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들 중 일부는 상상 가능하지만 대개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방식으로 겹쳐지고 교차한다.[ 4 ] 위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의 새로운 소통 형식, 삶을 조직하는 덜 소외된 방식을 창조해 궁극적으로는 현존하는 권력의 부적절함을 밝히는 모든 활동들. 기존 체계 바깥에서 접속하고 대항하는 힘을 실현하기 위해 아나키즘적 상상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P.S.

『목요일이었던 남자』의 후반부에서는 조직에 있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두 잠입한 형사였음이 밝혀진다. 애초에 조직 내부에 색출해야 할 무정부주의자는 존재한 적 없었던 것이다. 이 반전이 흥미로운 것은 ‘위장’이라는 소설의 목적이 일순간 흐트러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정부주의 조직은 어떤 집단으로 특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 여부를 공식적으로 확정할 수 없는 유령적 경로로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무차별적으로 결집하면서 시스템의 틈새를 탐색하는 활동은 특정한 무리나 일상적 언어로 포섭되지 않는다. 찾으려고 할수록 달아날 것이다. 우리는 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실천과 입장에 의해 탈중심적으로 만나고 흩어지면서 체제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조직의 의미를 반전시켜야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에 뭎의 공연은 꽤나 알맞은 장소다.

 

 


버틀러와 포스터: 양치기의 근심 (2024)
 

코리아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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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구성: 뭎 
출연: 강호정, 김준환, 손민선, 조형준, 홍서효
영상: 이현지

사운드: 정진화
조명: 임재덕

스타일링: 안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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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진행: 맹나현

진행도움: 박서영

영상기록: 신목야

사진기록: 최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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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주체 지원사업

 


팝업, 게릴라, 파르티잔 (2020)
 

백남준 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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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구성: 뭎 
시나리오: 정지돈

비디오그래피: 백종관
팝업구조물: 무단횡단
거문고: 황진아

나래이션: 카산드라 마토스

출연: 강호정, 손민선, 심우섭, 유민수, 조형준, 홍서효

불문번역: 카산드라 마토스

사진기록: 최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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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백남준아트센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검은 옷을 입지 않았습니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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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편집, 연출: 제예서(aka. 백종관)

퍼포먼스 연출, 구성: 뭎 

  • [ 1 ]

    필립 오스랜더,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의 수행성」, 허호정 옮김, 2006, http://tigersprung.org/?p=392

  • [ 2 ]

    “프랑스 운전자들이 차량에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형광색 민소매 조끼의 이름을 딴 노란 조끼 운동은 2018년 가을 에마뉘엘 마크롱의 차량 연료세 인상 결정에 반대하며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차량에 의존해 일해야 하는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타격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운동은 도시 외곽 지역 사람들의 일상적인 고민에 무관심한 친기업적인 정부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 운동으로 빠르게 변모했다. 정부는 연료세를 인하했지만 노란 조끼 지도자들은 정치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와 프랑스의 '부유세' 반환 등으로 요구 사항을 확대했다.”(“Black-clad youths clash with police as gilets jaunes mark anniversary”, The Guardian, 번역은 필자,

     https://theguardian.com/world/2019/nov/16/paris-police-fire-teargas-on-anniversary-of-gilets-jaunes-protests)

  • [ 3 ]

    존 하비, 『블랙패션의 문화사』, 최성숙 옮김, 심산문화, 2008, 13쪽.

  • [ 4 ]

    데이비드 그레이버,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나현영 옮김, 포도밭출판사, 2016, 90쪽.

  • 김예솔비

    영화를 중심으로 시각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이따금 영화 비슷한 것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