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증인인지 말해 달라
김유림

하라 료의 『천사들의 탐정』을 읽다 보면, 탐정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범인을 찾는 일도 범인에게 적정한 처벌을 구형하는 일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범인을 찾는 일보다 범인을 찾아가는 도중에 마주하는 도시와 도시의 사람들을 더 흥미 있어 하고, 범인을 찾은 뒤에는 범인과 범인의 주변인이 맺고 있는 ‘이야기’를 정리해 주는 일에 집중한다. 진범을 찾아내는 일이 이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좋은 혹은 잘 된 일 정도에 불과해 보일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탐정의 사전적 의미는 ‘몰래 남의 깊은 사정을 살펴 알아냄,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탐정은 도시도 모르는 새에 도시의 깊은 사정을 알아내는 일을 자신의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 그 사정을 나름의 관점으로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대한다. 그렇다. 하나의 사건과 엮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가 범인인지 결정하는 것이 경찰이나 검찰과 같은 수사 기관의 일이라면 탐정의 일은 이들 중 누가 증인이고 누가 증인이 아닌지를 이야기를 듣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에게 범인은 중요하지 않다. 범인을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가 타당한 방식으로 조립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의뢰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이러저러해서 이렇게 저렇게 된 일입니다, 라고. (그리고 그것은 본래 의뢰인의 것이었던 양 여겨질 것이다.) 그러니 증인이 될 법한 수많은 관계자들 가운데서 가장 그가 찾아 낼 ‘이야기, 그럴 듯한 사정’에 근접한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을 포함한 장소, 물건 등)을 선별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이야기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이야기에 가장-근접한-증언자로-미래에-판명이-될-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단 말일까.

 

 

근접성. 이것은 뭎의 공연이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한 가지 모티프 중의 하나다. 관객은 공연의 관계자―공연에 연루된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로서 ‘사건’으로서의 공연에 가깝다. 그러나 얼마나? 그리고 얼마나? 《양치기의 근심》은 질문한다. 통로에 관객들을 줄 세워 놓은 채로. 그러나 이때의 줄, 은 순위와는 무관하다. 누가 공연의 속내와 가장 가까운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물론 특정한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라면, 누군가는 ‘내가 사건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판명되었다, 결과적으로,’라고 주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귀결, 즉 결론에 이르는 일은 뭎의 장치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을 설명하지 못한다.

 

뭎의 공연에 연루되는 일은 무리에 섞여 있는 양치기(작가, 배우)와 물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운지가 사건에 대한 근접성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체험하는 일이다. 중요한 건 여기 통로에서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며 바로 그 사실이 벌어진 것과의 거리를 무색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먼 채로도 가까울 수 있으며, 가까운 채로도 멀리 있을 수 있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나’를 반드시 주요한 증인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공연을 이끄는 몇몇의 “양치기”나 종(鐘), 몸(corp)과의 거리와는 상관없이, 더 나아가 그 거리를 내가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나는 근접성이라는 이름의 벌어진 것에 깊숙이 연루되고 말거나 완전히 동떨어진 채 맴돌게 되기 때문이다.

공연을 보는 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나의 증인은?

 

 

마리아는, (...), 그녀의 언니 마르타가 집안일을 분주히 한 것과는 달리 “좋은 자리를 택해” 주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부분을 분별하고 이해하고 선택한 사람이다. (...) 이 삶과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삶이다 [ 1 ]

 

 

그러나 뭎이 공연을 통해 역설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 양들이 “좋은 자리를 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❶이제 공연(公演)은 밤이고, 통로이기 때문이다. 순서가 없기 때문이다. 근접성―어쩌면 만짐―의 문제는 통상적이고 고전적인 의미에서 중심 설정의 문제이기도 한데 통로에는, 도중에는, 밤에는 정확한 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양들에게 “분별하고 이해하고 선택”하는 능력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❷그게 아니라면,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공연(公演)은 밤이고, 통로이기 때문이다. 순서가 없기 때문이다. 근접성이라는 이름의 벌어진 것은 더 나은 근접성과 그보다 못한 근접성이라는 분별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심연이고, 밤이고, 통로이다. 이때 양들이 이해해야 하는 건 다음과 같다: 만지는 일이 중요해지는 건, 목격하는 일이 소용없을 때이며, 목격하는 일이 소용없어지는 때는 가장 가까울 때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가까이 있었다. 공연 내내, 양치기와 관객과 작가가 뒤섞인 채로 모두 가까이 있었으며, 이때 “좋은 자리를 택해” 주님 곁에 앉는 일은 사방에서 분간 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통로에서. 밤에서. 그렇다면 누가 이 밤의 더 나은 증인인가? 이런 시기의, 이런 시대의 탐정은 증인이 될 법한 수많은 관계자들 가운데서 그가 찾아 낼 ‘이야기, 그럴 듯한 사정’에 가장 근접한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을 포함한 장소, 물건 등)을 선별할 수 있는 걸까? “양치기의 근심”은 어쩌면 선별의 방법을 모른다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니라 선별의 방법을 아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걸 기어코 공연(公演)해야 한다는 심정으로부터 온다.

 

 


버틀러와 포스터: 양치기의 근심 (2024)
 

코리아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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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구성: 뭎 
출연: 강호정, 김준환, 손민선, 조형준, 홍서효
영상: 이현지

사운드: 정진화
조명: 임재덕

스타일링: 안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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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진행: 맹나현

진행도움: 박서영

영상기록: 신목야

사진기록: 최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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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주체 지원사업

 


모서리 – 경계 현상 (2017)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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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연출: 뭎 
출연: 조형준
드라마터그: 김상숙
음악: 정혜민
그래픽: 이진규
조명: 정세영

의상: 랜스 LIJ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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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록: 김성민, 전소영
영상기록: 김성민

  • [ 1 ]

    『나를 만지지 말라』, 장 뤽 낭시, 이만형·정과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70~71쪽.

  • 김유림

    시인, 소설가. 글이라는 매체와 쓰기라는 행위의 특성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글쓰기를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