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어떤 몸짓이 생생하다는 것, 또 몸이 생생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미뤄두었던 가림막 얘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우리가 보는 몸은 대개 무엇인가에 의해 가려져 있는 상태이기도 하니 말이다. 마침 네 개의 ‘Round’로 구획된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영상의 첫 파트에서 자막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거의 직접적으로 가림막을 다루고 있다.
“7살 때쯤이었나 모르겠어요. 그날은 독수리 오형제 마지막회를 하는 날이었으니 1990년 11월 9일이었네요. 마지막회의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안고 유치원에서 집으로 걸어가는 중이었죠.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서 집이 있는 303동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자동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서 중년 여성의 비명 소리가 들렸어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제가 돌아봤을 땐 푸른색 1.5톤 트럭 한 대와 거기서 내린 아저씨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제 또래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가 누워 있었는데 엄마로 추정되는 여성이 어린이의 머리 부분을 치마로 덮고 앉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어요. [……] 너무 끔찍한 상황에 사람들까지 모두 얼어붙어 있었고 저는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독수리 오형제 마지막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 정신을 차리고 303동 303호로 올라갔어요.”
이 이야기에서 잘 드러나듯 가림막은 우선 어떤 끔찍한 것을 가리기 위해 쓰인다. 그런데 누구로부터, 누굴 위해 가리는 것일까? 아이를 잃은 엄마가 아이의 훼손된 머리를 보고 충격을 받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즉 이 가림막은 아이를 위한 것, 아이의 머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가 이미 죽었다면 왜 그러한 보호가 필요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해 가능한 대답 중 하나는 현실이란 타자의 시선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엄마는 단지 타인들로부터 죽은 아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부서진 머리 그 자체를 현실로부터 보호하고 있던 것이며, 다시 말해 아이의 머리를 아직 깨지지 전의 상태로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엄마는 가림막을 이용해 현실을 속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서 등록되는 일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어린 화자에게서 가림막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이는 이 끔찍한 장면을 뒤로 하고 자신의 집으로 가는데, 그에게는 <독수리 오형제>의 마지막회라는 ‘더 급하게 봐야만 하는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화영화는 전형적인 환상의 무대이다. 즉 여기서 <독수리 오형제>의 마지막회는 그가 예기치 않게 마주했던 실재를 회피하게 해주는 가림막으로 작동하는 것이다(환상의 핵심 중 하나는 언제나 그것이 실재보다 더 급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런데 어린 화자는 만화영화에 빠져 방금 보았던 장면을 잊어버리기는커녕 “TV를 보는 내내 조금 전 트럭에 치인 어린이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여기에 가림막의 또 다른 기능이 있다. 가림막은 가림막을 들추려는 욕망을 생산하고 그 뒤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 상상은 근본적으로 외설적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모종의 침범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화자의 말에 따르면 “그 여성의 치마 속 모습이 너무 궁금했고 조금은 무서웠지만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욕망의 문제가 제기된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작동하는 가림막의 두 기능이 뭎이 우리의 몸을 바라보는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두 가지 원칙으로 정리될 수 있다.
1.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그리고 우리는 이 비존재를 들키지 않도록 지연시킨다).
2.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상상해야 한다(그리고 욕망은 이 상상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자 형식이다).
흔히 우리는 욕망이 눈을 가린다고 말한다. 욕망이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욕망에 의해 왜곡된 시선 속에서 평범한 물건은 더 값져 보이고, 더 매끈해 보이고, 더 아름다워 보이고, 또는 반대로 더 흉측해 보이거나 끔찍해 보인다. 그것은 우리를 어리석은 선택으로 이끈다. 욕망의 베일이 벗겨지고 나면 그 대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아무것도 아닌 대상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졌다가 파멸한 이들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늘 욕망을 경계하라 조언하고, 그래서 왜곡되지 않은 사물 본연의 모습을 보아야 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만약 그 사물 본연의 모습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어 있다면, 그래서 온전한 사물이란 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욕망이 대상 그 자체와는 관련 없는 어떤 왜곡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왜곡이 사라지면 대상 자체도 함께 사라져버린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의 교훈은 왕의 옷을 벗겼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더 이상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왕의 육신은 그 옷과 함께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렇기에 반대로 욕망은 하나의 역량,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역량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욕망 없이 본다는 것은 보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뭎에게는 바닥이 그냥 바닥이 아닌 것처럼, 몸도 그냥 몸일 수는 없다. 뭎은 늘 무대를 설치하고 서사와 좌표, 가림막 속에 우리의 몸을 배치한다. 바닥에 누운 공연자의 몸은 포대에 싸여 있고, 연기 속에 잠겨 있고, 또 그 위를 지나가는 문자에 의해 가려져 있으며(<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벽을 뚫고 나타나는 갑작스런 부분 대상으로서 등장하는 무엇이다. 부분 대상이란 욕망에 의해 분절된 신체의 부분들이다(<버틀러와 포스터>에서 조형준이 갑자기 벽을 뚫고 튀어나온 손을 살피는 모습은 마치 키스를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슬라보예 지젝에 따르면 그것은 “신체 없이도 존속하는 신비로운 자동성을 지닌 기이한 기관이다. 그것은 초현실주의 영화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팔과 같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신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지속되는 체셔 고양이의 미소와도 같다 [……] 보다 정확히, 그것은 공포 소설에 나오는 존재처럼 안 죽은 것(undead)이다. 숭고하게 영적인 불멸성이 아니라, 매번의 절멸 이후에도 스스로를 재구성하여 꼴사납게 존속하는 ‘산 죽음(living dead)’의 외설적인 불멸성이다.”
우리의 맥락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 욕망에 관통당한 신체, 부분 대상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어떤 대상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타자화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지닌 본래의 생생함을 박탈하는 행위 – 그러니까 유사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하지만 뭎에게 이 죽음은 그저 그 대상이 다른 울타리 너머로 옮겨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내 사랑, 난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 당신은 그저 다른 삶으로 넘어간 거였는데” 그래서 문제는 살아있는 대상 자체를 포착하겠다는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건너 다른 삶에 다다르는 데에 있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뭎에게 몸이란 하나의 꿈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뭎은 우리의 현실이 이 꿈만큼 생생해질 때까지 현실을 몰아가는 방식으로 몸이라는 실재에 다다르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보는 것은 다른 삶이고, 꿈속의 몸이다.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2024)
2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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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연출: 뭎
영상제작: 이현지
제작지원: 우란문화재단
사진: 언리얼스튜디오